爲政 第二
子曰
爲政以德
譬如北辰居其所 而重星共之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정치는 덕으로 한다는 말은
비유하자면, 북극성은 그 자리에 가만히 있어도 뭇 별들이 그것을 중심으로 삼아 도는 것과 같다
일반의 생각과 달리
고대의 천문학은 수준이 엄청 높아서
당시에도 우주에 대한 사고 수준이 꽤나 정교했습니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원리처럼
별들은 원운동을 하면서 주기를 갖고 있고
땅에서 보기엔 해와 달 그리고 별이 떴다가 지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이들의 운동이 거대한 시계와 같음을 알고 있었죠.
망망대해에서 항해를 하는 사람들이나
드넓은 사막 혹은 평원에서 긴 여행을 해야 하는 사람들은
모두 밤하늘을 시계와 나침반 삼아 시간을 재고 방향을 잡았습니다.
북극성은 밤 하늘에서 항상 그 자리에 있는 항성입니다.
북두칠성이 그 주변을 계절에 따라 돕니다.
북두칠성의 끄트머리가 가리키는 곳을
동서남북 네 방향에서 각 일곱 칸 씩 나눈 것이 28수(宿)입니다.
숫자 7은 아라비아에서 왔다고 추정되는데
그것은 중국이나 인도의 전통적인 숫자 개념들, 즉
24절기나 5행, 6각형의 숫자들과는 잘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치의 궁극적인 목적은 만 백성의 행복에 있고
백성들의 행복은 왕가의 흥망과는 사실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천하의 주인이 朴씨가 되든 文씨가 되든 혹은 安씨가 되든
백성들은 다만 부모에게 효도하고 자식을 배불리 먹일 수 있으면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봄이 오면 씨를 뿌리고 가을이 오면 수확을 해서 또 한 해를 나고
시간 나는 대로 낚시를 매고 고기를 낚거나 가을 하늘에 연을 만들어 즐길 수 있도록
세상이 내버려 두기만 한다면 '베리베리 땡스~' 그뿐입니다.
사실, 중국 역사 5천년 동안
정치가 백성들을 극도로 피로하게 만드는 근본 원인이었음을 부정하는 현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때문에 세상의 모든 왕이 되려고 하는 자들, 정치를 하려고 하는 자들은
정치의 근본 목적, 그것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정치의 근본은 바로 '덕'에 있습니다.
'덕 德'이란 '하늘이 내게 준 것'입니다.
하늘의 입장이 아니라 사람의 입장에서 다시 설명하면, '하늘로부터 내가 얻은 것'을 '득 得'이라 하는데
이 두 글자는 그 유래가 같고 발음도 모두 'de'인, 같은 글자입니다.
'덕'은 바로 우리의 본연적인 인간성 자체를 의미합니다.
하늘과 땅 자연의 근본 법칙인 도(道)가 내 안에 갖추어져 있는 상태를 '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배고프면 밥 먹고 배부르면 자고, 슬프면 울고 기쁘면 웃고,
여기에 더해 불쌍한 다른 사람을 쉽게 지나치지 못하고 뭐라도 나눠주야 하는 우리의 자연성,
그것이 바로 우리 모두에게 내재해 있는 '덕'입니다.
정치란 그런 '덕'을 최대한 발양시키고
'덕'이 무너지지 않도록 조절하는 행위입니다.
정치의 근본인 '덕'을 잊지 않으려고 했던 모든 왕들은
표면적으로나마 스스로를 '덕이 모자란 사람 寡德之人'의 줄임말인 '과인'이라 부르며
정치에서 덕을 잊을까 늘 경계하였습니다.
북극성은 그 자리에 가만 있는데
뭇 별들이 그것을 중심 삼아 돈다 .... 는 말은
위대한 정치의 참 모습은 마땅히 해야 하는 것을 열심히 해서
백성들 눈에는 정치 행위가 잘 드러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우리 대통령 이름이 누군지 잘 몰라~
우리 지역구 국회의원이 누구 아들이더라~ 이런 상태가 되면 좋은 정치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위대하신 MB께서는 하루라도 신문에 그 이름을 올리지 않으신 날이 없으시고
우리의 사랑스런 국회의원들은 국민들이 한미FTA 송을 지어 불러 절대 잊지 않으려 노력할 정도입니다.
선거철을 맞아, 좋은 정치를 하겠다고 많은 사람들이
당 이름을 바꾸고 이리저리 이합집산을 합니다.
고무신 돌리면 대통령이 되던 시대에도 시끄러움은 비록 덜 했지만,
누구도 좋은 정치였다고 말 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모든 별들이 북극성을 향하기는 커녕
제각각 먹고 살기도 바빠서 하루하루 다가오는 내일이 걱정이라 민심은 흩어지고 민생은 도탄에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선왕의 덕이 한참 떨어진 오늘날,
당분간 좋은 정치로 가는 길목에서 시끄러움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일상을 편히 누릴 수 있는,
후세들에 대한 걱정을 덜 할 수 있는,
편히 믿고 향할 수 있는 북극성은 과연 누구인지
시끄럽다 귀 닫지 말고 아프다 입 닫지 말고 꼼꼼히 따져 볼 일입니다.
子曰
詩三百 一言以蔽之 曰思無邪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시경 삼백여 편의 의미를 한마디로 줄이자면 '뜻에 삿됨이 없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시경은 본래 궁중과 민간에 흩어져 있던 시들을 엮어서 만든 책입니다.
지금 말로 하면, '80년대 빅히트 댄스곡 100선'이나 '평론가들이 뽑은 한국 롹 300선집'과 같은 모음집이죠.
공자는 시경을 편집하면서 얼마나 자주 읽었는지 '위편삼절' 그러니까
죽간을 묶은 가죽 끈이 세번이나 헤어져 다시 묶었을 정도로 또 읽고 또 읽고 했다는군요.
그렇게 시경에 정통한 사람이 그 시경의 좋은 뜻을 딱 세글자로 정의합니다.
'사무사' - 생각함에 삿됨이 없게 한다 !!!
시 詩라는 것은 굉장히 압축적입니다.
과거에는 기록의 수단들이 많지 않아서
누적되는 인류의 지혜를 주로 기억으로 암기하게 만들었습니다.
일본의 고시가집인 [만엽집] 같은 것들은 모두 지정된 전문적 무녀가 암송을 하여 기억했다가
후대에 이르러서야 문자로 종이에 기록된 책들입니다.
비근한 예로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들려주는 '옛날 이야기'들은 문자로 기록되지 않은 상태에서
손자와 손녀들에게 전승되다가, 나중에 책으로 출간되지 않았습니까?!
또, 대나무나 나무널을 이어 붙인 죽간이나 목간은 양이 한정돼서
가급적이면 낭비를 줄이는 방식으로 압축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중에 종이와 비단이 기록 수단으로 대중화되고 난 이후에야
시가 '부'로 '사'로 '전'으로 '설'로 점점 기록의 양도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짧고 정확해야,
은유가 아닌 직설이어야만
기록하지 않고도 외워서 남에게 들려줄 수 있고
비단이나 종이를 빌리지 않고도 죽간에 채워 넣을 수 있습니다.
간결해야 했으므로 직접적이었고
잊지 않아야 했기 때문에 솔직했습니다.
'사 邪'는 곧지 않고 삐딱하다는 말입니다.
'무사 無邪'란 시를 노래한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을 빙빙 돌리지 않고 솔직하게 말할 만큼
순수했고 정직했으며 풋풋했기에
그것을 시경의 가장 큰 덕으로 공자는 칭찬해 마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시와 소설을 비롯한 모든 문학이
그 기술이 직유든 은유이든 우리의 삶 자체를 정확히 반영하고 있지 않은 것이면
오랜 감동을 주지 않습니다.
아주 사소한 고양이 키운 이야기일지라도
개를 건너다 소녀를 만난 이야기라 하더라도
비록 허구를 빌렸지만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는 것들은 조금의 세월에도 곧 잊혀지고 맙니다.
개인적으로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과 같은 시대의 명작들을,
노동을 노래한 박노해의 시와
역사를 고발하는 조정래의 소설들,
인간을 말하는 한진중공업 김진숙의 글들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것들이 비록
몇천원에서부터 만 몇천원짜리 책 속에 갇혀 있는 글들이지만,
어느 것 하나 '邪'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子曰
道之以政 齊之以刑 民免而無恥
道之以德 齊之以禮 有恥且格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정치 행위로만 이끌려 하고 형벌로써만 동등하게 하려하면 백성들이 벗어나는 데만 급급해서 염치가 없게 되고
덕으로써 이끌어 주고 예로써 가지런히 해 주면 염치가 생길 뿐 아니라 존엄성도 갖추게 된다
[위정]편의 주요 내용은 '위정이덕'과 뒷부분에 나오는 '효'에 관한 내용들이 주인데
'위정이덕'과 관련해서 거의 이 말로 압축이 된다고 해도 절대 과언이 아닙니다.
'道'는 '말하다 說'란 뜻도 있고 '이끌다 導'란 뜻도 있습니다.
'齊'는 '큰 고깃덩이를 서너 사람에게 똑같은 크기로 배분한다'는 뜻입니다.
사회가 커지면 사람마다 욕구도 달라지게 되고
가고자 하는 뜻도 좋아하는 행동도 서로 차이가 생기게 됩니다.
국가와 천하를 논하기 전에 당장 집안에서만 봐도,
형제들이 많으면 집안에 늘 골칫거리가 생깁니다. 그걸 우리 어른들은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고 했습니다.
서로 다른 말들, 서로 다른 행동들을 일일이 처리해 주는 것이 '정 政'의 필요성인데
올바른 정치가 이루어지지 못하는 이유가 몇가지 있습니다.
첫째 사리사욕입니다.
둘째 무지와 무능력입니다.
흔히, 진보 진영은 보수 진영의 사리사욕을 욕하고
보수 진영은 진보 진영의 경험 미숙에 의한 무능력을 욕합니다.
그런데 이 두가지 결함을 한꺼번에 모두 갖추고 있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MB와 그의 가족, 그리고 절친들입니다.
이런 부류들은 논할 가치가 없으니 넘어갑니다.
배고픈 삼남매를 앞에 두고 부모 입장에서 고기 한 근을 썰어 나누어준다면 어떻게 나누겠습니까?
세상의 그 어떤 부모도 자를 갖다 대거나 저울에 달아 고기를 썰어 나누지는 않습니다.
한창 자랄 때는 아무래도 에너지가 더 필요한 장남을 조금 더 챙기기 마련입니다.
마음 속에 늘 둘째는 장남과 막내 사이에 껴서 제대로 못 얻어 먹인지라
시집갈 때 아낌없이 신혼 살림을 장만해 주고도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습니다.
막내는 사랑을 많이 받은 만큼 늘 버릇이 없을까 염려하여 회초리를 좀더 자주 댑니다.
8 남매인 저희 형제들은 이 과정을 두번 반 반복했습니다 ^^
카페를 운영하다 보면, 더러 싫은 소리 하는 개구장이들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카페 회칙을 아무리 손질하고 규율을 아무리 강화한다고 해도
이를테면, 하루에 글 다섯개 이상 올리지 마라~ 한 페이지에 글 세개 이상 올리지 마라~
1차 경고를 하고 나서도 자제하지 않으면 2차 경고를 하고, 2차 경고 이후에도 ... 3차 경고를 ... 블라블라~
사람들로 하여금 이렇게 갑갑한 규칙을 계속 강요하다 보면,
글 올리는 횟수는 날로 줄어들고
자기 검열만 강화하다 보니 창조적인 글쓰기는 커녕
남의 글, 인터넷에 떠 돌아 다니는 소식 나부랭이나 부지런히 스크랩해 오는 현상이 벌어지게 됩니다.
이런 상황이 바로 '백성들이 벗어나는 데만 급급하게 된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 한편에서는 이런 긴장을 즐기는 개구장이들이 또 판치게 됩니다.
규정을 피하느라 욕설은 숨겼지만 글에는 칼창을 교묘히 섞어서
점잖은 말투로 다른 이를 욕보이거나 조롱합니다.
그렇게 보기 싫다는 헐벗은 여인들의 그림으로 도배를 하고 다른 이들이 얼마나 견딜 수 있나 시험합니다.
이것이 바로 '염치가 없다'는 상태입니다.
덕과 예를 바로 세운다면,
사람들은 자존심을 되찾아 그 속에서 창의성을 백분 발휘할 것입니다.
자칫 방탕해 보이지만 날카로운 해학과 풍자가 살아 있고
서늘하기가 성에 같았던 사람에게서 정작 누군가의 슬픔에 가장 먼저 달려와 눈물 흘리는 인간적인 모습도
새롭게 발견하게 될 겁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좋다는 '덕과 예'는 바로 무엇인가?
지금부터 부지런히 그 얘기를 들려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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