ㄴ 비극의시대

[스크랩] ㅏ 기호로서의 언어, 상징과 신호

죄송이 2014. 4. 4. 12:01

 

1.

 

언어는 근본적으로 '신호적'입니다.

 

 

교통표지판에서 '파란불'은 진행을,

'빨간불'은 멈춤을 뜻합니다.

즉 특정한 기호는 특정한 하나의 의미로 약속됩니다.

하나의 기호에 하나의 의미만 부여하는 체계가 '신호(signal)'입니다.

 

'ㄱ' 'ㅏ' 'A' 은 이러한 음가를 가진다라고 서로 정한 약속의 산물들입니다.

매우 명징한 편에 속하죠.

 

 

 

반면, 언어는 또한 '상징적'입니다.

기호가 갖는 근본적인 성질이겠죠.

 

똑같은 보름달인데도

유럽에서는 마녀, 늑대, 사탄을 떠올리게 만들고

동양에서는 토끼, 소원, 어마의 포근함, 추수 후의 풍요로움의 의미가 깃들어 있죠.

 

 

그러나 같은 동양 사회에서도

보름달의 상징은 해안가 부락에서 또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집니다.

 

'₩' 라는 같은 기호를 보면서도,

누군가에게는 이것이 알파벳의 W 로 읽힐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화폐단위의 원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조금 헷갈리기 시작합니다.

문맥에 맞추어 잘 읽는 사람은 유식하다 소리를 듣고

이해하지 못하고 발설한 사람은 무식하다 소리를 듣습니다.

 

 

 

 

 

 

 

 

2.

 

상형문자로부터 시작된 한자,

'韓'과 같은 글자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이런 기호는 거의 회화의 성격을 갖기 때문에

이것이 신호인지 상징인지 극단적인 혼동을 유발합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그 속에서 '칼'의 의미를 읽어내는 이도 있고

이 글자를 보고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제후국 한나라를 이해하는 이도 있고

한반도의 삼한을 떠올리는 이도 있고

대한민국을 떠올리는 이도 있게 됩니다.

 

결국 이런 상징은 그 자체로서 존재한다기 보다

문맥 속에서 그 위치를 결정받게 됩니다.

 

기호를 상징과 신호의 속성으로 구분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의 기호와 대응되는 내포와 외연에 항상 적잖은 혼동을 수반하기 때문이겠죠.

 

 

 

 

 

 

 

3.

 

언어에는 수많은 종류가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말과 글입니다.

 

언어를 의사 교환의 수단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면

그 종류에는 '표정' '노래' '수기 신호'도 있고 '디지털 신호', '수화' '돌고래의 초음파' 도 있기 때문에

논의 중에는 항상 범위를 명확히 제한해 두는 것이 필요할 듯 합니다.

 

 

문자의 출발은 여러 설이 있겠습니다만,

그림으로부터 왔다고 추정하는 편입니다.

그림은 그 본래적 모습에서 신호보다는 상징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왜 ... 알타미라 동굴의 소 그림에서 글자 '牛'가 나타나지 않았을까 하는 겁니다.

거의 똑같이 생긴 소를 보면서도 사람들은 牛라는 기호를 쓰는 데 모두 동의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한자 얘기로 좀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소, 사람, 해 등을 본따 만든 한자어들, 牛 人 日 등은 상형자라고 부릅니다.

이것들조차도 진짜 상형자냐 반론하는 분들도 있습니다만 ....

 

고고학적 발굴의 성과에 힘입어

많은 갑골문과 금문, 대전 소전을 통해

초기의 한자들은 지금의 상형자들보다 훨씬 복잡하고, 훨씬 회화적이며, 그래서 훨씬 상징적이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복사(卜事)를 시행하고 그 점괘를 기록했던 정인(貞人)들끼리도 서로

종종 헷갈리거나 오독하거나 ... 심지어 싸웠을 겁니다. ^^

 

이것은 '드물다'라고 해석해야지 ...

좃까 ... '이건 선명하다'고 해석해야지 ...

 

 

 

 

 

 

4.

 

 

한자체계에서 상형자는 필연적으로 ....

뜻과 음을 이어 만든 형성자와

뜻과 뜻을 이어 만든 회의자로 확대되게 되는데

이러한 발전은 언어가 가지는 상징이라는 본질을 희석하고 신호로서의 기능을 늘리기 위한 고육지책이었습니다.

당연하게도, 이러한 확대는 언제나 '약속의 공유'라는 틀을 전제로 합니다.

 

그리고 그런 약속의 공유는 ... 강력한 권력과 통치를 기반으로 하였죠.

전국시대 각국의 글자는 그 모양이 서로 달랐습니다.

진한이라는 통일제국이 등장하지 않았다면, 공용어 한자의 모습은 지금과 매우 달라지는 운명이었을 겁니다.

 

현재도 한국 중국 일본은 각자 고유한 한자를 얼마간씩 가지고 있죠.

기호는 끊임없이 발명되고 공유되고 폐기의 순환을 걷습니다.

 

머지 않은 장래에 한글의 모습도 남북한의 분단이 지속된다면

같은 운명을 걷게 될지도 모릅니다. ^^

 

훈민정음 창제 당시보다 지금의 한글에는 사라진 자음들이 다수 있습니다.

남한과 북한의 언어 습관이 다르고

그것을 되도록 정확히 표현하려는 욕구는

아무리 인류가 지금까지 개발한 문자 체계중 가장 우수한 한글이라 하더라도 ...

자음과 모음 체계에 필연적인 변화를 NEED 하게 될 겁니다.

 

 

 

 

 

 

 

 

5.

 

상징은 하나의 기표에 여러 개의 기의와 엮이는 함수 관계를 표현합니다.

'아버지'란 단어는 보통명사로서,

내 아버지인 '홍길동'이란 어느 특정인을 가르키는 것이 아닙니다.

사전을 펴고 '아버지'란 단어를 찾으면 그곳에

 

[1] 아들을 낳은 이

[2] 기독교의 절대신

[3] 아주 많이 해 본 사람 

[4] 블라블라 ...

 

라는 식으로 여러 가지 묶음이 존재합니다.

 

 

이 때문에 신호와 상징의 이중 구조로서의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들의 대화는

여러가지 '미끄러짐'을 경험하게 됩니다.

 

대화 과정에서 나는 [1] 의 뜻으로 말했는데,

다른 이는 [2] 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대표적이죠.

 

'미끄러짐'이 필연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인간 어느 누구도 언어의 상징을 독점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언어의 본질은 민주주의에 가깝습니다.

일베충들이 언어를 '왜곡'해 자기식대로 쓰지만

그런 행위가 형법이 제한하는 특정 범죄 행위와 연결되지 않는 한

우리는 그들을 처벌하자고 외치기 힘들어집니다.

 

'미끄러짐' 현상은 놀랍게도

(1) 발화할 때 이미 한번 일어났고

그것을 (2) 수용할 때 한번 더 일어납니다.

 

이 대화에 누군가 끼어들면 (3) 다시 증폭되고

먼 곳으로 인용(4)되면 더더욱 복잡해집니다.

 

증폭의 파장은 문맥 속에서 한층 더 폭발적으로 강화되는 면이 있습니다 ...

 

 

 

 

 

 

 

6.

 

이를테면

누군가 '자지'란 단어를 사용해서 발화했을 때

'자지'란 단어가 무엇과 연결되는가에 따라

수용 과정에서 '미끄러짐'이 진실로 열렬히 일어나게 됩니다.

 

즉 '자지'를 라깡이나 데리다와 연결해 사용하면 순수한 학문적 연구의 대상으로 보이지만

'자지'를 빨다나 핥다와 연결해 사용하는 순간 외설의 절정으로 비칩니다.

 

또한 김용옥이 성경과 시경, 산스크리트어 경전으로부터 '보지'를 인용해 말하면 괜찮지만

일반 카페에서 섣불리 글을 올렸다간 뭇매를 맞기 십상입니다.

 

이는 비단 문자의 문제에서 뿐만 아니라

그림이나 음악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명한 화가들이 그리고, 비평가들이 명작이라고 인정한 명화들의 누드는 그 자체로 예술이 되지만

아무리 많은 회원을 거느렸더라도 포르노 잡지에 올려진 사진의 주인공은 외설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 과정에서 예술이나 외설이 그 자체로 사실 큰 문제를 유발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예술이든 외설이든 적절히 소비하면서 살아가고 있고,

그 나름의 사용가치를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예술과 외설의 경계에 권력이 숨어 있다는 것입니다.

 

인터넷에 올라오는 우크라이나 미녀들의 헐벗은 사진이

모나리자 그림보다 백만배 더 아름답다고 느끼는 사람이 다수임에도 불구하고

실재하는 것은,

비평가들이 그것을 '외설'이라고 규정했다는 현상이고

그 싸이트에 있는 모든 사진을 팔아도

모나리자 한 점 살 수 있는 돈이 안 된다는 가슴아픈 현실입니다.

 

 

 

 

 

 

 

7.

 

누드 화보를 한번이라도 찍은 미녀는

세계 미인 대회에서 입상한 후에도 자격을 박탈당합니다.

 

생계를 위해 누드를 팔았던 화가는

아무리 나중에 명작을 그려도 그의 누드를 순수하게 인정받기 힘들어 집니다.

 

 

 

 

일상의 매 순간에서

우리는 이러한 상징의 미끄러짐을 끊임없이 경험하게 되는데

이는 유쾌와 불유쾌의 억지 결합을 계속적으로 유발합니다.

그래서 자못 긴장되지요.

미세한 긴장은 ... 순간순간 우리가 권력으로부터 배제되고 있다는 불안감의 반증입니다.

 

그런 점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언어의 규정을 파괴할 수 있는 용자는

부러움의 대상이 됩니다.

부러움은 종종 시기나 질투로 나타나기도 하죠.

 

대화가 안 통하는 이들이 사회에 널려 있습니다.

가치관의 차이는 언어의 다양한 상징이란 무기를 통해 

약속의 불일치를 정당화시킵니다.

 

'민주주의'라고 쓰고 '계엄령'이라고 읽는 이들도 많습니다.

 

막 속이 터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깔끔하게 대화를 중단하면 되는데, 우리는 쉬이 중단을 못합니다.

권력으로부터 배제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일까요?

아니면 오히려 권력에 대한 무의식적인 집착일까요?

 

 

... ...

 

 

 

 

 

 

 

그리하여 숙명처럼 언어를 상징으로 선택했던 인간은

오늘도 궁리에 궁리를 거듭한 끝에

'상식'과 '감정' 그리고 '규범'과 '자율' 사이에서

묘한 줄다리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신사적'으로 약속하지만 또한

그 약속조차 영원불변하지 않다는 '단서'를 달아 둡니다.

 

'미끄러짐'의 숙명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대화하고

왜곡될 것이 뻔한 나의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

호르몬을 방출하고 얼굴 표정을 시시각각 바꾸면서도

한낱 억지스런 희망에 매달려 상징 가득한 신호로서의 '언어'를 전달하려 노력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불만족 속에서 그런대로 만족합니다.

일상이니까요 ...

일상은 투쟁의 영역이 되는 순간 매우 피곤해진다는 걸 잘 아니까요 ...

이런 피곤함이 권력으로 하여금 영원히 자신의 제국을 유지할 수 있게 만드는 원동력을 제공합니다.

 

 

 

 

우리가 일상의 언어에서 그럭저럭 만족하는 것처럼

조선시대의 노비들도 자신의 제약에 그럭저럭 만족하고 살았을 겁니다.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 고 데까르트가 말했던가요?

 

언어 세계에서

진정한 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고로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로고스에 대한 철저한 파괴만이 사실은

미네르바의 지혜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는 첩도가 될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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