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공야장 14 / 공문자의 민이호학과 불치하문
子貢問曰 孔文子 何以謂之文也
자공문왈 공문자 하이위지문야
子曰 敏而好學 不恥下問 是以謂之文也
자왈 민이호학 불치하문 시이위지문야
자공이 물어 말하길 공문자는 어인 까닭으로 '문'이라는 시호로 불리게 되었습니까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민첩하면서도 배우는 것을 좋아했고 아랫 사람에게 묻는 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았으니 이런 까닭으로 '문'이란 시호로 불리게 되었다
....................................................
공문자란 사람은 위나라의 대부로 이름은 '圉 어'입니다.
태어난 해는 정확히 알 수가 없고 다만 기원전 480년에 죽었습니다.
공자는 노나라의 역사를 중심으로 주변국의 정세에 대한 기록을 남겼는데 이것이 [춘추]라는 책이고
이 책이 워낙 은미하면서도 많은 내용을 함유하고 있어서 이것에 대한 자세한 주석을 후세에 단 책들이 여럿 있었으니
[춘추 좌씨전]이니 [춘추 공양전]이니 [춘추 곡량전]이니 하는 것들입니다.
[춘추]와 그 주석서들을 통해 이 시기의 역사를 자세히 알 수 있었으므로 '춘추 시대'라 부르게 되었고
[전국책]이란 책이 있었으므로 그 이후의 시기는 '전국 시대'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 둘을 합해 '춘추전국시대'라 부르기도 하지요.
[춘추]를 엮을 정도였으므로 공자는 위대한 역사가이기도 했습니다.
자공이 그런 공자 곁에서 이것 저것 많은 것들을 질문했을 겁니다.
공어는 노 애공 원년인 기원전 494년, 군사를 이끌고 나가
제와 노 연합군을 도와 당진(唐晉)을 공격하여 당진의 범씨(范氏)와 중행씨(中行氏)를 구하기도 했고
영공이 죽자 그는 영공의 손자이며 괴외(蒯聵)의 아들인 첩(輒)을 군주로 세워
노나라의 정경이 되어 정사를 주관하기도 했습니다.
살아서는 위나라의 현인이라는 명성을 얻었고 죽어서는 '공문자'라는 시호를 얻게 되었습니다.
자공이 궁금했던 것은 이러한 공어의 밝은 모습이 아니라 그의 어두운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유력 가문이었던 공어는 상위 귀족인 태숙(太叔) 질(疾)의 원래 처를 내쫓고 자신의 딸을 시집보냅니다.
그런데 이 '질'이란 인물도 한가락 하는 사람이었는지 자신의 원래 아내의 여동생, 그러니까 처제였던 여자와 바람을 핍니다.
이에 분노한 공어는 질과 자신의 딸을 다시 이혼시키고, 자신의 딸을 질의 동생에게 결혼시키려고 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공어가 질을 공격하기 위해 군사를 준비해 놓고 공자에게 상의를 하러 옵니다.
그가 온다는 소식을 들은 공자는 서둘러 종자에게 가마를 준비시켜 자리를 피합니다.
이런 공문자의 비행을 익히 알고 있는 자공이 스승에게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죠.
보통 민첩하고 영리한 사람은 남들보다 배우는 것을 싫어하기 마련입니다.
재벌 아들 중에 열심히 공부하는 이들이 없고
자수성가한 재산가의 2세들이 공부에는 뜻 없이 가산만 탕진하는 것을 우리는 흔히 봅니다.
부족이나 결여에 대한 'NEED'가 없다보니 공부를 해야 할 아무런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재벌이나 부잣집 아들 중에, 개나 소나 다 가는 유학 말고 진짜로 공부를 열심히 한 사람이 있다면
일단 그는 '호학'했다고 평가해 줄 만 합니다.
깊이 있는 학문의 세계에서는 끈기가 필요한데
어려서부터 남들 10시간 들여서 공부한 내용을 단 30분 만에 깨치는 아이들은
머리는 영리하지만 큰 인재가 되기는 힘듭니다.
공부에는 엉덩이의 무게도 중요하게 작용하는 법인데 머리 회전이 빠르면 제풀에 빨리 돌다 지치기 쉽기 때문이죠.
이런 머리들은 학문에 취미를 붙일 수가 없고 사업이나 사람 장사에 더 흥미를 느끼는 법입니다.
그래서 이 둘의 경우 모두가 '민첩하면서도 배우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말해 줍니다.
남보다 지위가 높거나 자리의 위세가 더하게 되면 모르는 것을 묻는 것을 수치스러워 하게 됩니다.
부장님은 말단 직원보다 모든 업무 면에서 많이 알고 있고
교수는 학생보다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대학교에 가면 학생회실에 학생들이 모여 앉아 2학년 선배가 1학년 신입생을 대상으로
무언가를 '졸라' 열씨미 가르치곤 했습니다.
그러다 후배가 선배의 말에 꼬투리를 잡고 질문을 하면
선배들은 곧 말문이 막히고 다른 선배에게 질문을 넘기거나
이도 저도 안 되면 후배를 윽박지르며 질문을 피해 나가곤 했더랬죠.
교실에서 학생의 질문을 받은 교사는 흔히 '참 좋은 질문이다~'라고 일단 해 두지만
'아직 너희들이 그것을 이해하긴 힘든 수준이기 때문에 답하지 않겠다'라고 구렁이 담 넘기 신공을 펼쳤습니다.
'다음 시간에 가르쳐주마~'라는 말이라도 해 주셨으면 간절히 바랬는데 그런 답변을 하는 교사나 교수는 참으로 드물었습니다.
상황이 이러할진대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위치와 다른 이의 위치를 미리 염량해
모르는 것을 질문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곤 합니다.
그래서 아는 척, 강의를 듣다가 모르는 것이 나와도 그냥 웃음으로 때우고 넘어갑니다.
공문자가 현실 정치의 권세에 눈이 멀어 인륜을 해치는 짓을 하긴 했지만
단 두가지 사실 ...
배우는 것을 좋아했고
질문하는 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았다는 ... 이 두가지 장점만으로도 그에게 '文 문'이란 시호를 주기에 아깝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다만 공문자는 자신이 한 공과 모두에 대해 정당하게 칭찬과 비판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도 있습니다.
" 누군가에게 수를 세어가며 한가지 두가지 칭찬하는 것은 그것을 제외하고는 나머지를 많이 잘못했다는 것이고
누군가에게 수를 세어가면 한가지 두가지 나무라는 것은 그것을 제외하고는 나머지는 대부분 잘했다는 의미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