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 논어 ] 를 읽어 보아요
오늘부터 논어 강독을 시작합니다.
군대에서 논어를 읽은 적이 있기 때문에
군대이야기 5편에 해당합니다.
저의 군대이야기 5편, 로맨스는 논어 강독입니다.
논어는 전10편 후10편으로 구성돼 있는데
학자들에 따라서 전10편만 공자와 그의 직속 제자들에 의한 저술이고
후10편은 약간의 위작이 아닐까하는 견해가 있습니다.
논어는 대화체가 많이 쓰여 있고
선생님의 말씀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도 있습니다.
대체로 문장이 짧고 압축적입니다.
글이 은미하다 보니, 해석의 갈래도 여럿입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정권을 옹호하는 글로
누군가는 혁명을 준비하는 글로 해석할 수도 있었습니다.
각 편의 제목은
그 편에서 가장 먼저 시작되는 구절의 두 글자씩을 따서 지었습니다.
제가 지은 게 아니고, 논어를 처음 구성한 사람이 그렇게 지었습니다.
저에게 뭐라 하지 마십시요.
시작하겠습니다.
올바른 사람에게는 즐거움이 몇 가지 있는데
그 하나는 배우고 익히는 것에서 오는 즐거움이라고 합니다.
'배운다'는 말의 어원은 '보다'라는 말에서 온 듯 합니다.
영어에서도 'study'의 시작은 'see'에서 출발하는데
무엇을 배운다는 것은 누군가로부터 본받는다는 것입니다.
이전에 '배울 학 學'이란 글자를 설명드리면서,
어른들이 집 위에서 새 이엉을 얹어 지붕을 바꾸는 것을 아이가 바라본다 ... 는 것이
이 글자의 원래 의미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보고 듣고 만져서 배운 것을 부단히 반복해서(습)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
세상과 내가 소통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학습이 인생 자체인데, 여기서 즐거움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 인생은 무미건조하기 이를 데 없을 것입니다.
뜻을 같이하는 벗(붕), 즉 동지들이 먼 곳으로부터도 종종 찾아온다고 했으니
주자의 해석을 빌리자면, 가까이 있는 벗에 대해서는 말해 무엇하겠는가 ... 라고 했습니다.
카페 식구들은 어찌 보면 뜻을 같이 하는 벗들이기 때문에
각자 멀리 있는 사람들도 인터넷을 통해 공간적 제약을 뛰어 넘어 소통할 수 있는
지금의 시대야말로 공자가 예견한 군자의 즐거움이 풍족한 때라 할 수 있습니다.
카페 생활을 하다 보면 이런 저런 어려움도 생기지만
크게 보면 이 또한 즐겁지 않습니까?!
무엇을 하려고 하는 사람은 때때로 주변으로부터 오해와 비난과 같은 차가운 시선을 받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파우스트]에 보면, '노력하는 자 방황하기 마련이다'란 말도 나옵니다.
군자란 무엇을 하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신념에 맞게 일을 추진하다 보면, 더러 사람들이 잘 알아주지 않습니다.
말 한마디나 행동 하나를 걸고 넘어지기도 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다른 사람들의 비판에 성급히 화내지 않고
이 일의 좋은 점에 대해 같이 하자고 설득하는 것이 군자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 구절을 좁게만 해석하면,
자기가 하는 일을 남들(소인배, 어리석은 대중)이 알아주지 않아도 나는 화내지 않는다 ... 라고 풀기 쉽지만
사실 군자가 하는 일은 자신의 개인적인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항상 의견을 제시하고 설득하는 과정을 필요 조건으로 수반합니다.
군자는 절대 혼자만 잘 났다고 설치는 독선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제가 열 다섯살 때 이 구절을 처음 배울 때는
선생님의 해석이 맘에 들지 않아서
'인부지이불온'을 '(제자를 가르칠 때) 잘 알아듣지 못해도 (선생님 된 입장에서) 화내지 않으면'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나중에 두고두고 그 생각을 떠 올리며 미소 짓곤 했습니다.
이건 여담이었습니다 ^^
이 세 구절을 연속으로 이어서 읽으면,
군자란 시간 날 때마다 널리 배우고 익히며
사회에 좋은 일을 하기 위해 가까이 있건 멀리 있건 뜻이 맞는 동지들과 교유하며
대중들이 그 뜻을 인정해 줄 때가지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말이 됩니다.
유자라는 사람은 공자의 제자인 '유약'입니다.
유자는 본래 사람됨이 어질고 공손해서 부모님을 편안히 잘 모셨다고 합니다.
그의 효행과 공손함이 칭송받을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에
[논어]에 한 구절 그의 말을 남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구절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은 글만 풀면 이렇습니다.
덕을 잘 갖추어 예절바른 사람은 윗사람에 대한 효제의 덕목을 지켜 항상 거스르지 않는다.
윗사람을 거스르지 않아야 크고 작은 분란을 일으키지 않을 수 있다.
따라서 [논어]를 배우는 사람들아, 윗사람 모시기를 동대문 앞 방망이 깎던 노인처럼 깍듯이 하거라~ 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제 큰 머리로 이 구절을 다시 솜솜 뜯어보면
원래 유자가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닐 뿐더러
[논어]의 편집자 역시 그런 의미를 살려 이 구절을 귀한 죽간에 실어 둔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회를 살아 가는 평범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낮에 열심히 공부하고 직장 생활하고 그 돈으로 삶을 꾸려갑니다.
부모님을 모시고 아랫 사람의 생활비를 댑니다.
세금을 내서 사회에 필요한 비용을 충당하거나 나를 포함해서 나보다 못한 이들의 복지에 이바지합니다.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들 모두는 사실 그 자체로 '효성스럽고 공손한(효제)' 사람들입니다.
또한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들이 웬만해서는 윗사람에 대해
그 뜻을 거스르거나 하고자 하는 일을 막지 않는 법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정치인들을 봅시다.
대통령, 국회의원, 판검사 ... 어떻게 보면 아직도 강하게 남아 있는 사회적 위계에서 이 사람들은 '윗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민주주의 사회에서 엄청 욕을 먹지요.
이 윗사람들이 맡은 바 일을 잘 처리하고 사심에 얽히지 않게 공정하게 할 일을 했다면
우리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절대 그 뜻과 행동을 거스르지 않겠지요.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요?!
대통령은 나랏돈으로 자기 아들 집 지을 땅을 사고
나라의 공항과 철도와 수도와 전기를 제 식구들에게 나누어 주려고 합니다.
국회의원들은 그렇게 국민들이 하지 말자는 한미FTA를 어리석은 사람들인양 속여서 밀어 부칩니다.
선거철만 되면 공손해지다가 선거가 끝나고 나면 턱끝으로 사람을 부리고 땅투기에 온갖 비리로 배를 채웁니다.
높으신 판검사들은 맘에 안 든다고 피고인에게 인격적인 모독을 하기 일쑤이고
가장 공정하게 억울함을 밝혀야 할 재판 과정에서 받아 먹은 뒷돈의 몇 배에 해당하는 부당함을 저지릅니다.
효제충신에 밝은 평범한 사람들이 윗사람을 거슬러
그들이 하고자 하는 일을 가로막고 나서는 것은 진실로 드문 일인데,
그런 일이 만약 실제로 일어났다면 그 윗사람이라고 하는 자는 진정 나라를 망치는 역적의 무리라는 얘기입니다.
공자의 제자인 유자가 이런 말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논어]의 편집자가 이 구절을 당당히 올릴 수 있었던 것도,
공자 또한 아랫사람의 처지에서 이런 패역의 무리인 윗사람을 처단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공자가 잠깐 관직 생활을 했을 때, 소정묘라는 악의 무리가 있었습니다.
MB보다는 못하지만 나름 사리사욕으로 배를 채우고 주변의 선량한 사람들을 괴롭히는 부패 정치인의 대표였습니다.
공자는 정치의 올바름을 세우기 위해 소정묘를 처단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 구절에 실린 유자와 [논어] 편집자의 속뜻이지,
결코 아랫사람은 항상 윗사람을 거스르지 않아야 하고
백성들은 군왕을 존경하고 잘 따라야 한다는
그런 하나마나한 사소한 말이 아닙니다.
[논어]를 잘 읽다 보면, 이것이 이미 2000년 전에 잘 쓰여진
[사적 유물론]이자 [당과 혁명론]이란 것을 알게 됩니다.